1. 창렬과 혜자
창렬과 혜자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유명한 연예인들의 이름이기는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인터넷에서는 다소 다른 의미로 변형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즉, 창렬은 가성비가 떨어지거나 내용이 부실한 것을 의미하는 반면, 혜자는 가성비가 좋거나 내용이 알찬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뜻이 생겼냐 하면, 역시 두 인물과 관련된 일화를 알아봐야 할 겁니다.
김창렬 씨와 김혜자 씨는 각각 편의점 도시락 광고모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김창렬 씨가 광고한 '김창렬의 포장마차'라는 제품은 가격은 비싼 데에 반해 내용물이 부실하고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김혜자 씨가 광고한 김혜자 도시락 시리즈는 가격에 비해 질이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도시락이 비교되면서 각 도시락의 광고 모델들에게서 유래한 창렬, 혜자라는 단어가 각각의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신조어들은 창렬스럽다, 혜자롭다 등으로 변주를 주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는 유튜브 쇼츠를 보다가 이와 관련된 영상을 보았는데, 댓글창에서 재밌는 의견을 발견했습니다. 창렬과 혜자라는 단어가 입에 착 달라붙을 뿐더러, 단어를 듣고 그 의미와 연관이 지어진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즉, 단어의 음성과 단어의 의미가 관련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이와 관련한 언어학적인 이론, 그리고 이와 반대된다고 할 수 있는 이론이 생각나서 이번 포스팅을 쓰게 되었습니다.
2. 부바키키 효과, 무엇이 부바이고 무엇이 키키일까요?
부바키키 효과라고 들어보셨나요? 이는 언어학, 음성학과 관련되어 있는, 굉장히 재미있는 실험에서 비롯된 효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이 밑에 있는 두 도형을 보고 각각에 이름을 붙인다고 합시다. 한 쪽은 '부바'이고, 다른 한 쪽은 '키키'라고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이때 어느 쪽을 부바, 어느 쪽을 키키라고 부르실 건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오른쪽을 부바, 왼쪽을 키키라고 이름을 붙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말은 부바라는 단어가 이미지가 오른쪽 도형에 잘 어울리고, 반대로 키키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왼쪽 도형과 잘 어울린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하버드 실험팀에서도 이러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실험팀에서는 미국의 영어를 쓰는 대학생들과 인도의 타밀어 화자들에게 위와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그룹이 모두 각각 95%, 98%의 비율로 오른쪽이 부바, 왼쪽이 키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리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부바'에서는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느낌, '키키'에서는 날카롭고 뾰족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실제로 'ㅂ'은 유성음인데다가 예사소리인 반면, 'ㅋ'은 무성음이고 거센소리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드러움과 거칢의 차이가 생긴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차치해두더라도 분명히 음성과 의미가 가지는 연관성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는 언어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언어학의 거장 소쉬르와 언어의 자의성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프랑스의 위대한 언어학자로, 구조주의 언어학을 창시한 현대 언어학의 대가입니다. 소쉬르는 그의 사후 제자들이 그의 강의를 정리하여 만든 책인 <일반언어학 강의>로 유명합니다. 이 책에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내용들을 비롯하여 현대 언어학의 뿌리가 되는 내용들이 많은데요, 그중 오늘 포스팅과 관련이 있는 개념은 바로 '언어의 자의성'입니다.
자의적이라는 말은 임의적이다, 무작위적이다 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요, 언어에 있어서의 자의성이란 어떠한 단어의 의미와 단어가 가지는 음성의 관계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단어의 의미와 소리가 짝지어진 것은 자의적, 그러니까 단순한 우연이라는 의미이죠. 소쉬르의 표현으로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의 결합은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언어학에 있어서 아주 기본이자 바탕이 되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무라는 사물을 예로 들어서 언어의 자의성에 대해 쉽게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인들은 숲에 있는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고, 영어 화자들은 'tree'라고 부릅니다. 독일어 화자들은 'Baum'이라고 부르는 등, 언어마다 이를 부르는 방법은 각양각색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은 나무를 다른 방식으로 부르니까요. 다른 말로 하면 나무라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의 음성은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어떤 사물이나 개념과 그것을 가리키는 음성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언어의 자의성 개념입니다.
이때 다시 창렬과 혜자, 부바키키 효과로 돌아가봅시다. 분명 우리는 창렬과 혜자라는 두 단어의 어감에서부터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어의 소리와 그 의미를 연관짓고 있는 것이죠. 부바키키 효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전적인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부바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 키키는 무언가 뾰족한 것을 나타낼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면 소쉬르가 주장한 '언어의 자의성'은 틀린 것일까요? 언어학의 거장 소쉬르가 제시한 매우 기본적인 개념인데, 이것이 부정당하는 것일까요? 어떤 대상의 소리와 의미, 즉 기표와 기의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예시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음성에서 오는 어감이나 느낌은 단순히 우리의 착각인 것일까요?
4. 훔볼트의 언어 세계관 이론
앞서 이야기한 부바와 키키를 다시 살펴봅시다. 우리는 부바와 키키에게 우리의 직관과 느낌을 토대로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한편, 역으로 언어의 자의성 부분에서는 같은 사물이나 개념을 언어별로 다르게 부르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다른 도형(부바와 키키)에 다른 느낌을 받아 다른 이름을 붙인 것처럼, 거꾸로 한 개념(나무)이 여러 이름(tree, Baum 등)으로 불림으로써 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해당 개념에 서로 다른 느낌과 인상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언어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는 위와 같은 이론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용어로는 민족마다 언어의 세계관(Weltansicht)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에 따르면, 언어는 우리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대화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면 어쩔 수 없이 사고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를 단어의 단위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이야기한 창렬과 혜자, 부바키키 효과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들끼리는 단어, 문법 구조, 혹은 그에 담겨 있는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 중 단어에 초점을 맞춰본다면, 앞서 말했듯이 한 개념을 가리키는 단어의 음성이 전부 다르다는 점이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가리키는 음성이 다르다면, 자연스럽게 언어 화자에 따라서 같은 단어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의 음성적인 측면 또한 민족 간의 세계관이 상이하다는 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소쉬르가 제시한 언어의 자의성에 부합하지 않는 사례들 간에 일종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셈입니다. 그에 따르면 기표와 기의의 결합, 즉 의미와 소리의 자의적이지만, 소리가 의미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우리가 여러 예시와 이론들을 통해 확인해보았기 때문이죠.
5. 마무리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히 되짚어 보겠습니다. 창렬과 혜자, 부바키키 효과는 단어의 소리가 단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소쉬르가 제시한 언어의 자의성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훔볼트의 언어의 세계관 이론 또한 앞선 예시들과 관련지어 보았을 때 언어의 자의성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서술한 예시와 이론이 언어의 자의성을 부정하는 근거라고 명백하게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일개 학부생이고, 따라서 전문적 지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있게 언어의 자의성이 틀렸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할 수 있는 여러 사례들이 언어학적인 이론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지, 또 어떤 식으로 반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언어의 자의성에 반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여러 언어학적 개념, 이론을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이 고민해본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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